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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늙은 농민운동 이대로는 죽는다

동곡 2007. 4. 9. 11:50
"늙은 농민운동, 이대로는 죽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계기로 농민운동은 또 한번의 '결전'을 결의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운동의 미래를, 또 우리 농업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13일 발행될 <녹색평론> 2006년 3~4월호(제87호)에 실린 '늙은 농민운동, 확 바뀌어야 농업 농민이 산다'는 기고를 통해 농민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이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감안해 필자와 <녹색평론>의 동의를 얻어 2회에 걸쳐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늙은 농민운동, 이대로는 곤란하다

숱한 농민들이 목숨을 던져 농업 개방을 반대하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집회와 시위를 되풀이하며 세계화와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는다. 때로는 소중한 쌀을 불태워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트랙터와 경운기로 고속도로를 막기도 하고 때로는 서울 시내 도로 곳곳에서 격렬하게 경찰과 대치하거나 거리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2005년에는 6·20 총파업 투쟁이라는, 노동자들이나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농민 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농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은 그냥 힐끗 한번 눈길 주고는 이내 잊어버린다. 아니 이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웰빙'인지 뭔지 무(無)농약의 건강한 먹을거리 찾는 데는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런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절박한 처지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넘어 무시해버리는 이런 비정상의 비정함과 철저한 배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까닭인가. 도대체 이런 안타까운 죽음과 시위와 저항과 반대가 언제까지 그들만의, 농민들만의 피눈물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도대체 이런 농업 농민의 죽음과 소멸은 개방화 시대에 핸드폰과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동안 역대 정부가 내놓은 농업 정책은 농업·농민 포기 정책이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농업·농민 안락사 정책, 대놓고 말하면 대기업 살려주기 위해 식량 안보 팔아먹는 농업·농민 아웃소싱 정책, 미국과 다국적 곡물 메이저 카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국 농업·농민 팔아먹기 정책이었다. 문제는 이 같은 농업·농민 몰락의 위기에 맞서 농민운동이 보인 대안제시의 능력이다. 과연 농민운동은 그동안의 격렬한 저항과 숱한 죽음을 통해 세계화를 저지했고 수입쌀 개방을 막았으며 농업 농민을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는가. 또 앞으로도 저지할 수 있고 되살아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세계화를 막을 수가 없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아무도 농업과 농민을 살려낼 수 없다. 자본가가 그렇게 할 리도 만무하고 1사1촌이니 뭐니 반짝 캠페인을 벌이는 언론이 그렇게 할 리도 만무하다. 카길이 한국의 농업·농민을 특별 대우해서 종자 보관용으로 내버려둘 리는 더더구나 없고, 현대나 삼성이 농업과 농민의 회생을 위해 멸사봉공하거나 식량도 겸할 수 있게끔 씹어 먹을 수 있는 자동차나 핸드폰을 개발할 리도 만무하다. 농업과 농민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 살려내야만 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오직 농민들 자신뿐이다. 오로지 농민들 스스로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농민들이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설 때 그제야 비로소 도시의 깨어 있는 인민들도 함께 나설 수가 있다.

지금까지의 농업·농민운동은 저항과 부정의 운동이었다. 그나마 이제 그런 저항과 부정의 운동도 활력을 잃고 힘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낡고 늙은 운동으로 전락해 버렸다. 농민운동은 이제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 언제 수명이 다할지 모르는 암울한 운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정으로 농업 농민을 되살리기 위한 농민 스스로의 젊고 활기찬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근본에서부터 180도 전환이 있어야 할 절박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

지금까지의 농민운동은 솔직히 대안 운동으로서는 지극히 협소한 전망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농민운동은 곧바로 긍정과 대안 모색의 농업·농민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농민운동은 이제까지의 낡은 운동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농민운동은 이제 기존의 애벌레 껍질을 깨고 탈바꿈을 과감히 시도해야 한다. 날개돋이를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마치 이제는 거의 멸종해버린 학생운동처럼 끝이 나고 말지도 모른다.

끔찍한 식량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대안의 농업운동, 대안의 농민운동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농업 관행 자체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공업화된 농업이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농업인지 재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화학농업은 엄밀하게 말해서 석유농업이다. 그것은 자원순환 농업이 아니라 자원약탈 농업이다. 물론 이 화학농업을 통해 지구의 식량 생산은 급속하게 높아졌다. 195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세계 곡물 생산량은 2.5배나 증가했다. 에너지를 그렇게 투입했는데, 그 정도의 에너지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화학농업의 결과는 끔찍한 파멸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의 저금통을 까먹는, 미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도저히 지속불가능한 자살 농업이다.

무엇보다도 화학비료는 농토를 완전히 병든 산성 토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로 인해 병충해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더 많은 농약을 뿌려야 하는 악순환을 자초하고 있다. 게다가 농약은 벌레만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도 죽이는 독약임이 명백해졌다. 녹색혁명 또한 이제는 불가능한 환상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종자개량을 통한 농업생산량 증대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른바 생명공학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농업생산량을 높일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더더구나 이는 환상이자 더욱더 위험천만한 자연파괴 행위임이 확연해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영국의 환경부 장관이 지금의 농업구조는 지속불가능하다고 선언했겠는가.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농지는 공장과 창고, 빌딩과 주택, 도로와 주차장, 그리고 초지 등의 용지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 경지면적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감소로 돌아섰다. 전 세계 농민 가운데 5억 명은 먹고 살 경작지가 한 평도 없다. 흙이 1cm 만들어지는 데 대략 20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매년 약 240억t이 넘는 표토가 유실되고 있다. 표토가 유실된 농토는 곧바로 염분이 많은 불모의 땅으로 변하고 사막화가 진행된다. 거기다 중국과 인도를 필두로 전 세계가 경제개발과 급속한 산업화 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곡물 소비 성향이 단순 곡물 소비에서 곡물 집약의 축산물과 물고기를 통한 단백질 섭취로 급속히 이동 중이다. 이에 비해 전 세계 인구는 유럽에서는 감소 추세라고 하지만 이미 65억 명을 넘어서고 있다. 세계 식량 생산량은 1996년 이후에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인구는 늘어나니 당연히 1인당 곡물 생산량은 감소할 수밖에 없고 세계 곡물 재고량도 감소하고 있다. 밀과 쌀 가격이 2배로 뛰었던 1970년대 초 이래 세계 곡물 재고량은 60일분이 조금 넘는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화학농업의 근간인 석유는 그 생산이 정점에 도달하는 피크오일(Peak Oil)이 2007년에서 2010년일 것으로 석유가스정점연구회(ASPO)가 예측하고 있다. 석유 정점이 되면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이고 지금의 값싼 비료와 농자재, 농기계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20세기 후반기에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사막화, 홍수 등 크고 작은 자연재해와 이상사태는 10배나 늘어났고 그 빈도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화라는 '리바이어든'이 출몰한 이래 단 200년 만에 2배나 높아졌다. 이제 다양한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던 지구라는 낙원은 불타는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멕시코난류(Gulf Stream)의 흐름이 3분의 1이나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유럽에는 조만간 빙하기가 도래하리라는 불길한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이같은 기후변화는 곧바로 식량생산에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한 마디로 끔찍한 식량재앙, 식량 전쟁이 바로 타이타닉 5분전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에너지 재앙, 에너지 전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악몽의 '쓰나미'가 바로 코앞에 닥쳐오는데도 누구도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에이 설마' 하거나 '그때 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이른바 '설마' 의 맹목에 중독되어 있다. 그렇게 안전하다고 정부와 전문가들이 보장하는 원자력 발전소가 '설마 사고야 나겠어' 하고 잊고 지내는 것과 똑같다.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체르노빌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현재의 곡물 생산량은 지구상의 65억 명의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 굳이 식량과발전연구소(Food First)의 주장을 되살리지 않아도 이는 상식이다. 지금 세계 곡물생산량의 40%가 가축 사료로 소비되고 있다. 특히 미국은 곡물 생산량의 80~90%를 가축사료용으로 소비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비만과 다이어트, 제3세계의 굶주림과 기아사망이 공존하는 기이한 문명병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같은 부조리와 불합리는 물론 식량의 불평등한 분배에 그 까닭이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배를 불리는 곡물 교역량 80% 점유의 미국계 카길,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와 프랑스계 드레퓌스(12%), 아르헨티나계 벙기(7%), 스위스계 앙드레(5%) 등 5대 곡물메이저들, 몬산토와 같은 유전자 조작 종자와 농약생산 다국적 기업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 소농 중심의 지역 식량 자립을 무너뜨리고 있는 국가가 있는 한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굶주림은 분명히 식량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 체제의 문제이고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러나 푸드퍼스트는 지금의 식량생산이 현재의 햇빛에너지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석유라는 과거와 미래의 햇빛에너지를 약탈해서 이룩한 생산량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생산량은 석유가 고갈되는 그 순간 거품이 빠지듯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한 식량생산량이란 엄밀하게 말해 현재의 햇빛에너지로 생산되는 생산량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구는 지구생태계 차원에서 명백히 과잉인구이며 이는 어떤 형태로든 조절과정을 거쳐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이다. 그것이 전염병이건 전쟁이건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몰살이건 그 중심에는 식량재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렇게 되지 않고 '현재의 햇빛에너지 자립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적어도 인류의 멸종까지는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인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 곡물시장은 늘 과잉생산과 과잉공급 상태였다. 물론 그때그때의 작황에 따라 일부 나라에서 대규모 수입을 하게 되면 곡물가격은 춤을 추었다. 1972년 구소련이 흉작으로 곡물을 수입하게 되자 국제 밀 가격과 쌀 가격이 단숨에 2배로 치솟았다. 한국이 1980년대 초에 200만t 규모의 쌀을 긴급 수입할 때도 곡물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93년 일본이 쌀의 대흉작으로 말미암아 250만t 규모(전세계 무역량의 약 20%)에 이르는 쌀을 대량 긴급 수입하기로 하자 세계 쌀시장은 순식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곡물시장은 공급과잉에서 공급부족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2002년 9월 캐나다는 가뭄과 고온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자 다음해 수확기까지 밀을 수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개월 후 이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생산량 부족으로 이전에 거래하던 나라에 한하여 밀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2003년이 되자 유럽에 찌는 듯한 기상이변이 강타했고 유럽연합은 곡물의 전면 수출중단을 선언했다. 2004년 초 중국이 마침내 밀 800만t을 수입해야 하는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이것은 21세기 식량시장에 지난 세기와는 전혀 다른 가장 큰 변수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그리고 세계 식량 사정이 이전과는 전혀 질이 다른 문제에 봉착했음을 나타내는 신호탄이었다. 그해 8월 중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쌀 50만t을 수입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국제 쌀 교역량이 현재 약 2500만t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이 가운데 1600만t을 태국, 베트남, 미국이 수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식량수입국 전락이 미치는 앞으로의 국제 곡물시장 혼란을 짐작하게 한다.

미국은 농산물 수출로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내고 있다. 또한 곡물자급률 127%로 세계 곡물교역량의 35%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군수산업과 농업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본디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자국의 농업 보호를 이유로 농산물 수입을 철저히 제한해 왔다. 미국정부는 아직도 농장주들 순소득의 절반 이상을 직접지불금으로 보전해주고 있다. 현재의 WTO 협상은 이런 미국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 미국은 식량을 무기로 자국의 무역적자를 보전하고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런 재앙의 위기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7% 수준이다. 쌀을 빼면 그나마 5%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적색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인데도 우리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또한 늑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양치기소년 쳐다보듯이 무심하게 흘려버리고 만다. 정부는 10년 후인 2015년에도 식량자급률을 그저 30%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한다. 끔찍한 재앙이 다가오고 있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맹목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식량자급률은 75%로 나머지 25%를 사올 돈이 없어 수십 수백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어죽었다. 돈을 주고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리고 돈을 주고도 에너지를 살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한국의 식량사정은 과연 어찌 될 것인지 그저 암담할 뿐이다.

2004년 말 현재 농민은 341만 명(총인구 4800만 명의 7.4%), 농가호수는 124만 호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기 전인 1960년 1460만 명(총인구 2500만 명의 58%), 233만 가구에 견주면 근 반세기만에 얼마나 농업과 농민이 파괴와 쇠락의 길을 걸어 왔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0년 32.9%에서 겨우 3.5%(2003년)로 줄어들었다.




[프레시안 2006-03-13 09:27]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13일 발행될 〈녹색평론〉 2006년 3~4월호(제87호)에 실린 '늙은 농민운동, 확 바뀌어야 농업 농민이 산다'는 기고를 통해 농민운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당면한 한미 FTA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고 농업과 농민운동의 재정립,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가지면서 새로운 통찰력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감안해 필자와 〈녹색평론〉의 동의를 얻어 지난 9일 이 글의 전반부를 소개한 데 이어 후반부를 소개한다. 〈편집자〉

농민운동, 180도 바뀌어야 한다

식량 재앙에 대한 대책은 너무나 자명하다. 식량 자급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명확한 기획과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농민운동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농민운동은 식량 자급에 대한 뼈저린 자각을 통해 농업·농민 문제에 대해 다수의 인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의제 설정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명확한 대안 제시도 하지 못했다.

물론 한국 농민운동은 그동안 농업·농민에 대한 당대의 수탈과 잘못된 현실을 뜯어고치기 위해 농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참으로 어려운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해 왔다. 한국 농민운동은 동학농민전쟁 이래 끊이지 않고 투쟁해 왔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철벽을 뚫고 노동운동과 함께 아래로부터 사회를 개혁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풀뿌리 민주공동체의 싹을 틔워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선 오늘날 한국 농민운동은 그 정당성과 존립 자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동안 일반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오던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이제 시대착오의 집단이기주의로, '나이 많은' 농민들의 불쌍한 항변쯤으로 치부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 있는 연대나 지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농민운동은 과거지향의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고, 도시인들로부터도 젊은이들로부터도 미래비전으로부터도 소외된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다. 노동운동이나 일반 시민사회 또한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온정주의 이상의 시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위기의 원인은 농민운동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WTO 반대투쟁이나 시위 집회가, 그동안 전농과 농민연대가 수행해 온 미국반대, 개방반대, 통일농업의 구호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모든 저항과 반대에 앞서 농민운동은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아가 일반 시민들도 공감하는 새로운 농촌공동체 건설과 긍정의 농업 농민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농민운동은 그런 희망과 공감을 주는 데 실패했다. 실제 농민운동은 농업 농민을 살리는 어떤 프로그램도, 식량자급의 구체화된 어떤 프로그램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농업은 천민의 직업 정도로 인식되고, 농민운동은 그저 그런 이익집단의 집단행동이나 청원운동 정도로 전락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농민운동의 성과로서 1990년 4월 결성된 전농의 강령을 보면, '농민적 토지소유', '식량 자급형 농업', '환경 보장형 농업', '통일 대비형 농업', '전업적 가족농을 통한 농업의 협동화' 등이 명시되어 있다. 전농이 추구해야 할 농업의 대안이 뚜렷한 용어로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강령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 그 길과 방식에 대한 구체안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전농은 과연 자신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현실에서 어떤 기획을 하고 어떤 실천을 했던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농민운동은 명확한 이념과 전망이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떤 사회운동도 이념과 전망이 없거나 불명확하면 그것은 운동으로서 지속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해서 광범위한 저항과 반대의 물결이 온 사회를 휩쓴다 해도 뚜렷한 이념과 미래에 대한 구체상이나 상상력을 갖춘 조직 집단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전략전술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아니 그런 전략전술을 갖고 있다 해도 인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 또한 실패로 끝나기가 십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이 그러했고, 20세기 최대의 실험이었던 현실사회주의가 그러했다.

우리의 먹을거리를 농약투성이인 외국산 화학농업의 산물에 맡길 수는 없다. 우리의 건강권을 위해서도 그렇고 식량안보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식탁을 우리의 농약투성이 농산물로 채운다는 것도 똑같이 안 될 말이다. 한국 농민운동은 우선 자신들부터 화학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런 근본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에너지 과소비의 관행농업, 에너지 외부의존, 외부종속의 화학농업, 석유농업은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우리의 미래도 결코 아니다. 쌀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는 종자에서부터 논밭갈기, 씨뿌리기, 모심기, 농약뿌리기, 가을걷이, 가공, 포장, 저장에 이르기까지 엄청나다. 사실상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다량의 석유까지 함께 먹고 있는 셈이다.

농민운동, 이제 '햇빛 농업'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유일무이한 대안은 '현재의 햇빛 농업'(현재의 햇빛 농업이란 관행 화학농업이 과거의 햇빛 에너지가 응축된 석유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약탈 농업임을 빗대어 글쓴이가 만들어 낸 말임. 모든 농산물과 생명은 현재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 에너지의 산물이며, 또한 해,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 재생가능에너지[이들도 사실 현재의 햇빛 에너지가 기본임]를 이용하는 농업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썼음)이다. 에너지 자립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지금 이 순간의 햇빛 에너지를 이용한 건강한 농업만이 현대 산업문명의 눈먼 미친 질주를 멈추게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햇빛 에너지를 마구잡이로 강탈하는 농업은 인류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자살농업일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주범이자 여섯 번째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파괴의 농업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인류는 단 200년 만에 지구상의 화석연료를 거의 절반 이상 마구 퍼다 써버렸다. 우라늄조차 약 50년, 채굴하는 데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까지 합해도 100년이면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 우리나라 에너지 의존율은 97%로 그것도 자랑스러운 세계 1위다. 게다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중동지역에 대한 의존율이 73%에 이르고 수급 또한 철저히 석유메이저에 종속되어 있다. 아무리 반미를 외치고 자주독립을 말로만 떠들어보았자 지금과 같은 석유 정치에서 한국은 처음부터 반미가 불가능한 에너지 수급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농민운동은 구호만의 반미, 반세계화에 앞서 에너지 자주독립의 대안부터 모색해야 한다. 2005년 우리나라 석유도입액은 420억 달러나 되고, 석유소비량은 1200억 리터나 된다. 63빌딩을 320번 채울 수 있는 양이며 드럼통을 늘어놓으면 서울부산을 648회 왕복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같은 에너지 광(狂)낭비의 경제체제에 속한 농업에 그대로 함몰되어 있으면서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과 자립을 모색하지도 않고 단순히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것은 어쩐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에너지 집중, 에너지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에너지 지역 자립과 자치의 분산형 재생가능에너지 체제를 지향하는 현재의 햇빛농업만이 우리들 자신의 건강을 보장해주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멈추게 해주고,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농약 사용을 멈추게 해주고,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농업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거대한 기계문명의 물신화를 멈추게 해주고, 양극화를 멈추게 해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농업공동체의 형성과 지역의 도농연대를 통해 지역 자립과 자치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밑에서부터 실현해 나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통해 튼튼한 식량자급의 기지가 형성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햇빛농업을 실천하는 주체는 기업농이 아니라 당연히 소농 가족농일 수밖에 없다. 지역 자립에 튼튼하게 토대를 둔 가족농 중심의 식량자급이야말로 지금의 대규모 공장제 화학농업을 대체하는 유력한 대안이다. 우리는 이런 소농 가족농을 되살려야 한다. 이들의 협업이야말로 지역공동체를 되살려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지름길이다. 가족농의 경우 적정 규모는 3000평 정도이다. 우리나라 평균 농가 호당 경지면적은 대략 3500평이다. 우리는 이미 소농 가족농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현재의 햇빛농업에 가장 근접하게 걸맞는 것이 지금 유기농이라는 이름의 무농약 농업이다.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역사는 정농회의 발족과 함께 근 30년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생산비중은 0.05%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나라들이 3%에서 10%인 것에 견주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기계농, 화학농의 대국인 미국의 0.1%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농도 석유를 이용한 유기농이라면, 그리하여 대규모 기업형 유기농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는 말 그대로의 지속가능한 햇빛농업과는 거리가 있다. 기업형 유기농업 또한 우리의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자립과 도농 간 지역연대의 공동체 형성과도 거리가 멀다. 최근 일부 대기업이 만주에서 대규모 유기농 단지를 조성하고 대형 할인점에서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면서 이른바 유기농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앞뒤가 뒤바뀐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국적 곡물기업의 목표는 분명하다. 소농과 가족농을 말살시키고 기업농, 공장제 농업을 양성하는 것이다. 말이 좋아서 기업농이지 자신들이 생산하는 유전자조작 종자를 사서 자신들이 생산하는 농약을 치고 자신들이 고가로 팔 수 있는 지역으로 팔아먹는 농업노예들을 양산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 면에서 6㏊ 규모의 전업농 7만 호를 육성해 100㏊가 넘는 외국의 대농장과 경쟁시키겠다는 것은 소도 웃을 난센스의 정책이다.

집약농업과 공장제 축산은 그만큼 에너지 위기와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잦은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 최근의 조류독감 바이러스, 니파 바이러스 확산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런 집약농업과 집약축산 대신 분산농업과 분산축산이 뿌리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다를 건너온 농축산물이 가격이 싼 까닭은 그만큼의 노동력 착취와 자연착취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과소비의 농축산물 교역은 다국적 기업의 배만 불려줄 뿐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재앙일 뿐이다. 그 농축산물은 농약과 항생제와 각종의 화학물질이 뒤범벅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암 촉진제일 뿐이다.

햇빛 농업으로 진정한 자립이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의 햇빛 농업을 통해 다국적 곡물기업에 예속되지 않는 소농 가족농 공동체와 지역의 도농공동체를 밑에서부터 건설해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뜻있는 소수의 농민들에 의해 도시와 농촌의 연대가 모색되고 도농 직거래운동을 통한 유기농운동이 정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20년 가까운 역사의 한살림생협은 이제 그 회원이 11만 명에 이르고 있고, 유기농 학교급식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농민운동은 자신의 핵심 과제로서 이같은 직거래운동을 지역 자치의 공동체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각종의 시민사회 조직과 직접 교류하는, 그리하여 대규모 농산물 시장에 종속되지 않는 생산과 소비의 도농 직거래 운동은 그 자체가 튼튼한 민주주의와 자립 자치, 식량자급의 기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진전될 때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과 분산형 에너지 자립 체제도 가능해지게 된다.

우리나라 대외경제의존도는 70%에 이른다. 세계화는 필연이 아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운명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나친 대외의존도와 세계화는 나라경제와 지역경제를 지나치게 수직계열화해 외부의 충격에 손쉽게 무너지는 지극히 허약한 체질로 바꾸어 놓았고, IMF사태에서 경험했듯 사실상 위험경제, 위험사회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완전고립과 자립의 아우타르키(Autarkie)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맹목의 세계화, 개방화 논리에 함몰된 외부 의존경제의 위험성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말이 의존이지 그것은 사실은 눈먼 자원 착취, 비정하고도 끔찍한 나라 안팎 인민 착취의 고상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외부에 종속된 노예의 삶으로 바꾸어버린 이런 의존에서 탈피해 자립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민중경제다.

한때 군사독재 정부조차 경제개발정책을 시작하면서 자립경제를 목표로 내걸었고, 민주화운동 또한 대외의존을 탈피한 자립경제를 당연한 운동이념으로 내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정부 들어 자립경제란 용어 자체를 시대착오의 전근대 개념으로 내팽개치고 경멸하고 있는 것은 근대화에 철저히 눈이 먼 민주화운동의 이념을 웅변해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하는 오늘날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면서 오히려 박정희 향수가 광범위하게 재생하는 것은 당연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자립경제는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이자 출발이다. 그리고 지금 이같은 자립경제는 현재의 햇빛농업을 통한 식량자급과 에너지 자립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수 중심의 지역 자치 자립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지름길이다. 농민운동은 이제 이런 대안의 농업과 에너지 자립 체제의 구축을 실천하는 전망을 새롭게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화 경쟁력, 규모의 경쟁력 이데올로기를 밑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의제는 먹을거리의 안전성이다. 대규모 화학농법으로 만든 먹을거리는 거의 독극물 수준임을 농민운동은 제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 농민들부터 화학농업으로부터 현재의 햇빛농업으로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공장폐수와 생활하수 등으로 강물과 지하수를 오염시켜놓고는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마시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매연을 뿜어대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참으로 이상한 정신병자의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영위하고 있다. 농민운동은 이같은 이상한 생활에 대한 문제제기부터 시작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부터 그러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농민운동이 반미투쟁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냐 반정부투쟁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때그때의 당면과제 성격에 따라 미국에 대해서도 정부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런 투쟁에 앞서 우리는 대안의 실천, 대안의 생활을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 시급하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함께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이농의 물결이 지속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자그마치 1000만 명 넘는 농민이 도시로 도시로 살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귀농의 물결을 조직해야 한다. 숨 막히는 도시노예를 벗어나 자유로운 노동의 연대를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대이동을 준비해야 한다.

학교급식, 군대급식을 햇및 농산물로 바꾸자

농민운동은 운동방법의 변화 또한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군사독재의 시대가 아니라 적어도 언론과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이 된 민주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민주화시대에 아무리 방어수단이라 하더라도 대중동원형 폭력 시위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공감도 얻지 못한다. 폭력시위를 통해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는 것은 국방의 의무 때문에 마지못해 거기 서 있는 젊은 전경들뿐이며 대중동원형 시위 때문에 불평이 터져 나오는 것은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는 일반 시민들이다. 도식화 되어버린 불타는 전경차와 피 흘리는 농민 식의 언론보도 탓을 할 게 아니라 실제 시위 형태를 철저한 비폭력 평화 노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현재의 햇빛 농업은 뭇 생명까지도 살리는, 지극히 평화를 지양하는 농업 농민운동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치밀한 사전준비를 통해 군대급식을 유기농으로 바꾸라고 국방부 앞에서 평화로운 연좌시위를 하는 게 백배 낮다. 학교급식을 자연 순환형 햇빛 농산물로 바꾸라고 교육부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공연을 펼치는 게 훨씬 더 수많은 인민들을 감동시키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도시의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을거리의 안정성 문제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아토피와 각종의 도시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먹을거리만 깨끗하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지만 그러나 우선 당장 안전한 먹을거리라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와 군대 급식만 제대로 현재의 햇빛 농산물로 바꾸어도, 여기에 노동조합과 연대해 기업 급식까지 유기농으로 바꾸어도, 초중고 400만 명, 대학생 250만 명, 공무원 140만 명, 군인 60만 명, 기업까지 합하면, 이것만 하더라도 현재의 햇빛 농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은 충분히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농민들이 싸운다는 데 외면하거나 반대할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이런 운동에 드러내놓고 반대할 언론이나 정치인, 기업인들도 사실 많지 않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이라고 해봐야 비행기 몇 대 값이다. 솔직히 고속도로 1km 건설비용이 약 600억 원이다. 그리고 이제는 토건족만 살찌우는 더 이상의 도로 건설은 중지되어야 마땅하다. 바로 이런 예산이 우리 사회의 농업 농민 살리기에 투입되어야 한다. 농민운동은 이런 긍정의 건설과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과감하게 싸워나가야 한다. 이외에도 농민운동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도시농업, 주말농장 활성화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농업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을 도시인들에게 체험하게 해야 한다. 학교를 비롯 각종의 도시 공간에서 확산되는 현재의 햇빛농업 농지는 젊은이들의 산 체험장일 뿐만 아니라 귀농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저항과 방어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은 개척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 가운데 가장 휘발성이 강한 의제가 비정규직 문제와 농업문제다. 농민운동은 이제 대안의 농업 농민운동을 시작해야 하며 그것은 현재의 햇빛 농업과 농민운동에 대한 폭넓은 인민의 지지를 형성하는 일이자 생태적 전환을 밑에서부터 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농민운동은 아직도 충분히 그러한 긍정과 대안의 운동으로 전환할 힘이 있으며 그것이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운동 선배들의 헌신에 값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주 미약한 실천일지라도 나부터 시작하는 실천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는 나비의 날개 짓이다. (끝)

박승옥/시민발전 대표

* 자료출처: http://www.pressian.com
출처 : 우수카페 [공식]♡귀농사모♡
글쓴이 : 박상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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